첫 문장:
가위에 눌렸다 깨어난 지난겨울 아침이었다.
P. 9-10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 세계에선 내가 주인공이라는 걸.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걸. 그걸 알게 되자 좀 더 자신감이 생겼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잘 살아남을 테니
주변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집중해 보자!
- 「서문: 내향인의 소소품일기」 중에서
P. 22
SNS 게시물을 후루룩 넘겨 보다가 갑자기 ‘이런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마라’는 문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누굴까, 이런 사람. 출처 없이 돌아다니는 이런 카드 뉴스에 매번 혹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이 날 상종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한 장씩
읽어보는데 이럴 수가, 정말 나였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카페에 가서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
- 「우리는 매일」 중에서
P. 56-57
그렇다면 지금은 나만의 방식을 찾은 걸까? 모두가 모두의 방식을 조금씩 따라 하고
참고하고 인용하는 이곳에서 과연 나만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 발견한 게 있다면, 나는 말줄임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말투를 어떻게 바꿔서 쓰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다른 사람이 쓰는 말줄임표에서도 도착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쓴
말줄임표를 보면 그 사람이 다 꺼내지 못한 감정을 내가 이어서 받는 느낌이 든다.
- 「말줄임표의 쓰임」 중에서
P. 66
나는 내 책을 읽은 사람 앞에서 늘 약간씩 자신이 없는데, 언제나 실제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나, 실제의 나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상적인 나를 그려놓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 뻥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면 어쩌겠는가. 실제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나를 만나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데,
만나게는 해줘야지......
- 「이상적 거리」 중에서
P. 136-137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쓰려는 이유는 소설이란 어둠상자에 나를 숨기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숨기지 않고 다 말했을 때 과연 독자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독자는 굳이 이런 것까진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런 것까진 궁금하지
않을 거야.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이상한 사람 맞지만 절대 숨기자.
아직 있지도 않은 가상의 독자를 핑계 삼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는 일을
반복하느니 처음부터 자 여러분, 이건 소설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하고 시작하는 게
나도 편하고 받아들이는 독자도 편하고 서로에게 안전하지 않을까.
- 「진실과 상상」 중에서
P. 144-145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설명한다고 다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이상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여자들을 자꾸만 꺼내어 생각하고,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글
속에서 만나고, 내 글에도 담기 위해 또 생각하다 보니, 현실에서도 그런 여자가
좋아졌다.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여자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싶고
더 생생하게 쓰고 싶어졌다. 얻어걸린 성별이라선지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경험을 다 해본
것도 아니고, 절대로 하고 싶지 않거나 평생 할 수 없을 경험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가보고 싶은 만큼 가보고 싶어졌다.
- 「시작은 벡델 테스트」 중에서
P. 184-185
내가 살면서 보아온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기에
내가 죽은 뒤에 다른 누군가가 나의 기억장치를 꺼내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참 다행
아닌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원하는 기억만 꺼내어 쓰면 되니까. 편집과 재구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실과 상상 사이를 오가며 에세이와 소설 중간 어디쯤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내 기억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기억의 각본가이자 연출자이다.
- 「당신을 기억할 무언가」 중에서
저자 소개
강민선
계속 쓰는 사람.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2017년에 독립출판물 『백쪽』을
시작으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2018), 『월요일 휴무』(2018),
『시간의 주름』(2018), 『여름특집』(2018), 『가을특집』(2018), 『나의 비정규
노동담』(2019), 『비행기 모드』(2019), 『외로운 재능』(2019), 『우연의
소설』(2020), 『자책왕』(2020), 『겨울특집』(2020), 『극장칸』(2021), 『하는
사람의 관점』(2022), 『비생산 소설』(2023), 『지도와 영토』(2024) 등을 쓰고
만들었다. 저자로 참여한 책은 『상호대차』(이후진프레스, 2019), 『도서관의
말들』(유유, 2019), 『아득한 밤에』(유어마인드, 2021), 『끈기의 말들』(유유,
2023)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