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미조의 50년간의 작업의 근간이 되어온 드로잉이라는 매체에 주목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로 제안한다. 이번 도록은 작가의 대표작인 “영의 세계”(1992-1994)와 “기호, 형상, 상징” (1995- 1997)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초기 드로잉들을 구획한 책이다. 파리 유학시절에 해당하는 시기에 인물과 자화상, 여성 누드와 신체를 주로 다룬 습작과 작가가 경험한 동서양의 아카데믹한 미술교육의 실기작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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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조라는 이름은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설지만 7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들에게는 대단한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들마저도 그녀가 삶의 대부분을 화가로서 전념하며 살아온 길은 거의 알지 못한다. 정미조는 가수로 데뷔하기 전부터 화가를 꿈꾸던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실험적인 화법과 과감한 스케일로 일찍 인정받았다. 졸업과 함께 시작한 7년간의 가수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절정의 순간에 그녀는 단호하게 화가의 꿈을 좇아 파리로 떠났다.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1980-1984)를 거쳐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간 그녀는 여러 차례 국제 예술 그랑프리에서 수상하며 작업의 동력을 얻어갔다. 그리고 한국 민화와 전통 무속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단청 물감의 강렬한 색채로 독특한 작업을 이어갔다. 이를 계기로 전통 무속을 연구했고 논문 「한국 무신도(巫神圖) 연구」로 1992년 파리 제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로 확장하면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85년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4번의 개인전과 100여 차례 단체전을 가졌다. 2015년 정년으로 퇴임하기까지 22년간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여전히 정미조라는 이름은 가수로 먼저 호명될지 모르지만, 그의 생애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치열하게 예술혼을 사르며 살아왔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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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조는 인물과 자화상, 여성누드와 신체를 주로 습작한다. 이화여대와 초기 파리 유학시절 때, 정미조의 누드 여인과 자화상은 실제적인 여인들로서, 고전의 격조와 인체 비례의 제약을 어느 정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엄한 아카데미풍의 정미조의 인물과 누드 드로잉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보이는 색채와 자유로운 포즈로 자연 그대로의 육체가 어떠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 여실히 보인다. 냉철할 정도의 미적 계산이 된 드로잉은 현실적 촉감과 열정의 찬연함과 따뜻함의 양의적인 내면을 가진 정미조의 초기 드로잉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조심스럽고 수줍어하는 누드의 여인과 점잖은 체 하는 동작의 인물은 무게와 반응을 가진 인물과 말을 거는 것이 가능해 보이는 인물로서 내적 속삭임과 내면의 이념에 빛나는 모습으로 전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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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조의 작품 세계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드로잉들은 그녀의 화폭과의 공생(共生)을 의미한다. 공생은 생물학적 용어이긴 하지만, 그것은 자아가 항상 거듭하여 대상과 맺어지면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계속 살아가는 것, 지속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미조의 지금까지 작품세계는 그녀의 수많은 드로잉 습작과 자유로운 공생 관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